[영상] UWF vs 신일본 10인 제거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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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과 UWF의 이데올로기 전쟁의 절정에 열린 경기입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긴장감과 살기에 뒤엉켜있는 분위기.
그리고 마에다의 이노키에 대한 무서운 감정.
그때문에 마에다와 이노키의 싱글 매치를 이 시합으로 바꾸었다고 하네요.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지난날 래리어트 방정식에 프로레心님이 작성하셨던 글입니다.


[re] 신일본과 UWF와의 관계(답글입니다.)  
프로레心   2006-04-10 21:21:40, 조회 : 215 
 

UWF~ 

현대 일본의 프로 종합격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단체죠. 신일본과 UWF와의 관계는 저도 일본 프로레슬링 입문 초기에 마에다 아키라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각종 자료를 찾아가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

우선 UWF는 1차와 2차로 나뉩니다. 진정한 의미의 UWF는 역시 2차인데... 신일본과의 관계를 따질려면 1차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마 82년인가 83년인가로 알고있는데(오사노 카케히로씨가 쓴 '쇼와 프로레스 유신'에서 본 내용입니다) 당시에 신일본이 타이거 마스크에 쵸슈-후지나미 항쟁, 그리고 외국인들 장사로 재미가 짭짤하던 때입니다. 초호화멤버가 집결한 IWGP리그 등으로 완전 신일봄 붐을 구가하며 전일본을 제끼고 독주하던 시절인데... 문제는 이렇게 영업도 잘하고 장사도 잘했던 때에 신일본 내부에 돈이 도통 남아나지가 않았던 것이죠. 

원인은 이노키가 구상중이던 의약관련 사업인 안톤 하이셀. 당시 신일본에는 이노키의 오른팔격인 인물로 이노키와 아삼육이던 신마 히사시라는 사람이 재직중이었습니다. 영업총본부장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노키가 이 쓰잘떼기 앖는 안톤 하이셀이라는 땡전 한푼 못버는 사업에 신일본의 돈을 쏟아부었던 것이죠. 바이오마스 에너지 계획이라는데... 이노키의 제2의 고향인 브라질에서 실시중이었던 듯 합니다. 아무튼 초기엔 가능성이 보였다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들어가자 실패가 속출하고 거기에 브라질의 국가 경제 위기꺼정 겹쳐셔 그야말로 연수베기에 백드롭까지 따불로 먹은 꼴이 왼 거죠. 자금조달에 애를 먹자 신일본의 자본에 사원들로부터 모은 돈, 종국에는 레슬러들의 퇴직금 비스무리하게 모은 돈까지 유용, 이것이 들통이 나서 직원들과 레슬러들간에 이노키와 신마에 대한 불만과 불심이 증폭, 급기야는 쿠데타 사건으로 번지게 되죠.(당시 쿠데타 파의 머리격인 인물중 하나가 야마모토 코테츠) 원래는 이 쿠데타파의 일원이었던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가 쿠데타 파의 행동개시보다 조금 앞서서 신일본을 이탈해버립니다. 이는 사야마의 매니저격이던 사람이 쿠데타파와의 묘한 갈등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일으킨 것이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래서 타이거는 독자적인 프로덕션으로 먼저 이탈. 그리고 쿠데타파가 이노키와 신마에게 추궁 및 선언을 하는 것이죠. 직원들이 너희들을 못 믿고 있다. 쓸데없는 안톤 하이셀 같은 거에 돈 나가는 꼴 못보겠다. 책임지고 물러나라~ 그래서 당시 사장이었던 이노키, 부사장이었던 사카구치 세이지, 그리고 영업총본부장이었던 신마의 3사람(톱3)이 직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노키와 사카구치는 레슬러였기에 시합은 그대로 뛰었지만 프런트 인사였던 신마는 한마디로 축출된 것이죠. '과격한 기획자'라는 별명으로 신일본 황금기를 이끌었던 영업의 달인이며 이노키의 오른팔이자 이노키의 폭주를 컨트롤할 수 있었던 인물이 결국 신일본에서 쭃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신마란 사람이 1차 UWF를 만든 장본인 입니다.(그에 앞서 마에다 아키라를 발굴해내 신일본에 데뷔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노키에 대해서 사장이나 동지 이상의 강력하고 아리송한 '우정'을 가지고 있던 신마는 아랫것들로부터 개밥된 이노키를 위한 신단체를 설립합니다. 이것은 이노키와의 사전 협의에 의한 것으로 이노키 역시 '그래. 그럼 신마, 니가 먼저 가있어라. 나는 계약등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몸을 빼겠다.'라고 해서 일단 신마에게 단체를 만들어놓을 것을 지시(?)합니다. 이때 신마는 이노키에게 늦어도 창단 시리즈의 최종전인 국기관 대회까지는 와달라고 했습니다. 

궁극의 스트롱 스타일의 구현장을 주창하며 UWF 설립에 움직이던 신마. 이노키의 동의하에 신일본으로부터 마에다 아키라, 후지와라 요시아키, 다카다 노부히코, 키도 오사무, 그란 하마다의 5명을 빼갑니다.(그란 하마다는 당시 소속이었는지 어쩐지는 확실히 모르겠군요) 여기에 당시엔 거진 프리 신분이었던 럿셔 키무라와 그레이트 사스케 가면의 원조인 마하 하야토, 그리고 은근히 유명한 역시 국제 출신의 프리인 고우 류마도 참가합니다. 

문제는 결국 이노키가 1차 UWF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미 공개적으로 선전을 해놓은 상태인데...(당시엔 이노키 외 쵸슈 등 유신군단의 참전도 있다고 선전해놓은 상태) 이에 책임을 지는 형태로 신마 히사시가 1차 UWF에서 물러나며 1차 UWF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누구나가 믿고있던 이노키 참전이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흥행적으로도 고전. 골때리는 것은 창단 시리즈의 최종전에 이노키가 다카다를 통해 마에다가에 '신일본으로 돌아와라'고 전했다고 하죠. 책임감 없음은 이 때부터 유명했던 듯... 즉, 이노키가 버렸다기보다는... 만들라고 해놓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좀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당시 이노키는 신마에게도 UWF측에게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분노를 느낀 마에다와 UWF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단체를 이끌어나가기로 결심. 미리 신일본을 이탈해 독립해있던 사야마 사토루에게 같이 뛰어보자고 권유해서 사야마가 슈퍼 타이거로서 1차 UWF에서 복귀를 하게됩니다.(무한대기념일이라는 코라쿠엥홀 대회였죠) 이 떼 사야마와 같이 온 사람이 바로 야마자키 카즈오. 이 땐 사야마의 체육관의 연습생이었습니다. 

사야마가 UWF에 참전하면서 마에다, 후지와라, 다카다, 키도 등 칼 고치로부터 사사받았던 레슬러들은 고치류 스트롱 스타일을 표현해보자고 결의, 관절기와 그라운드 기술의 공방을 살린 스타일을 시도합니다. 거기에 사야마가 본인이 꿈꾸던 이상적인 스타일이던 슈팅(타격기 중심. 슈트의 원조격?!)이 합쳐져서 타격과 관절기가 교차하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가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그러다가 마에다와 사야마의 갈등이 붉어지다가 마에다가 그만둘 결심으로 그 유명한 급소차기 시멘트 시합을 벌입니다. 당시 UWF내에서 따당하는 분위기였던 사야마는 이 사건으로 UWF를 이탈, 같이 왔던 야마자키 카즈오는 UWF에 잔류, 이후 U 신화를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하게됩니다. 

그나마 스타급이었던 사야마의 이탈과 누적된 적자로 1차 UWF는 결국 붕괴, 이후 마에다는 남은 선수들과 임원들을 살리기 위해 신일본과 업무제휴, 그 유명한 신일본 vs UWF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86~88년간 실현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전쟁 중 베스트 바우트 상위 5위 안에 드는 86년 3월, 토쿄체육관에서 열린 5대 5 제거전은 원래 이노키 vs 마에다의 싱글로 치뤄질 예정이었으나 마에다가 너무나도 위험한 분위기를 풍겨(이노키에 대한 공,사적인 분노 누적) 링 위에서 비상사태가 날 것을 염려하여 대회 전 5대 5 제거전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이때 이노키와 마에다의 대결에서는 확실히 위험한 분위기가 팍팍 풍겼습니다. 

그러다가 84년, 저팬 프로레슬링 참가로 신일본을 이탈했던 쵸슈 리키가 휘하의 선수 몇명을 이끌로 87년 봄에 신일본 매트 복귀, 신일본 vs UWF의 쌍방간에 쵸슈 군단이 합류하여 3각 구도로 진행됩니다. 그게 진행이 잘 되어야하는데 돌연 싸움의 구도가 나우리더 vs 뉴리더의 세대 투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이러면서 쵸슈-마에다-후지나미라는 환상적인 트리오가 구성되었지만... 문제는 공동투쟁중이던 중 쵸슈가 일방적으로 연합전선의 해산을 선언해버리면서 이게 맥이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 때 마에다가 '말뿐인 두목이군.'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집니다. 현재 종합격투기 역사의 원류인 2차 UWF 탄생의 도화선이 된 그 사건! '쵸슈 안면 축격사건'

이 사건은 당시 앞서 말씀드린 쵸슈의 일방적인 공투 해산 선언으로 마에다가 쵸슈를 비판한 뒤에 벌어진거라서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마에다의 의도적인 시멘트였다라는 설이 나돌고 있지만... 물론 가능성은 있고 아주 조금은 그런 부분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에다 본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사인미스에 의한 돌발적인 사고'라는 것 입니다. 마에다의 이야기가 또 재미난게... 여기에 텐류가 엮이게 됩니다. 

당시가 아마 87년 11월 29일의 코라쿠엥홀 대회에서의 6인 태그매치로 아마 멤버가 '마에다/키도/다카다 vs 쵸슈/마사 사이토/히로 사이토' 였을 겁니다. 앞전의 갈등도 있고 해서 시합은 히트 업~ 그러다가 시합 중 쵸슈가 키도 오사무에게 전갈 굳히기를 걸고 있을 때 마에다가 뒤에서 다가와 쵸슈를 안면을 향해 미들킥! 안면에 피를 흘리게 된 쵸슈. 시합은 쵸슈와 마에다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서 급하게 폴을 결정지어 종료, 이후에는 쵸슈와 마에다를 말리며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릅니다. 

마에다는 이에 대해, "당시 우리들(UWF군단)의 스타일로는 얼굴을 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기 직전 쵸슈씨의 어께에 손을 얹어서 '찹니다'라고 신호를 보낸 뒤 찼지만... 쵸슈씨는 그런 부분을 100% 이해하진 못했던 것 같다."며 고의성은 없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킥으로 시합의 분위기가 이상함을 나머지 멤버들이 감지했다는 걸 보면... 음... 분명 예사롭지 못한 부분은 있지 않았을런지... 또 재미있는게 마에다는 왜 이같이 격하게 시합을 했는가에 대해 "당시 전일본에서는 텐류씨가 쵸슈 군단이 떠난 전일본 매트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텐류동맹을 결성해서 격렬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와지마씨 등의 얼굴을 그냥 슈즈로 끈자국이 날 정도로 막 차버리는 등... 우리들은 상호간의 보호를 위해 방어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차는데.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는 영향을 받아서 좀 더 격렬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더."라고요. 비약해서 말하자면 쵸슈의 전일본 이탈->텐류 동맹 발발->마에다 자극->축격 사건~ 뭐 이렇게 엮일 수도 있다는 건데... 

아무튼 이로인해 그렇지않아도 신일본측으로서는 밉상이던 마에다를 제거할 껀수를 찾게됩니다. 이전부터 신일본측의 말도 잘 안듣고 UWF군단을 단단히 이끌고 있었으며 외국인 선수들로부터 기피대상이 되곤 했던 마에다. 게다가 돈 나카야 닐슨과의 이종격투기로 주가마저 급상승, 스트롱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이노키의 목을 위협하기에 이른 마에다. 우선 사태의 중함을 물어 근신 처분, 그러다가 일방적으로 멕시코로 수행을 더녀오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마에다와 멕시코... 제대로 어긋났죠. 당연히 마에다는 이를 거부.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신일본이 마에다를 해고. 처음엔 분명 업휴제휴의 형태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UWF군단이 소속으로 전환됐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88년 1월, 마에다는 신일본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몇년간의 1월의 공포로 여겨지던 대형 선수의 이탈이 이때부터 시작된 걸 수도 있겠군요. 

외톨이가 된 마에다, 자포자기 하다가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고 굳게 다짐한 뒤 다카다와 야마자키, 그리고 UWF의 연습생이었던 안죠 요지 나카노 타츠오 등에게 권유해서 2차 UWF를 시작합니다. 1차에서 신일본과의 항쟁으로 견고하게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나가던 U의 보다 더 진화된 스타일을 선보이며 이후 2차 UWF는 80년대 후반, 젊은층을 중심으로 팔발적인 붐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릅니다. 기존의 프로레슬링과의 차별성을 두며 실전의 이미지를 풍겼지만 결국 2차 UWF도 완벽한 실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차 U도 붕괴, 이후 3파로 분열....

그리고 95년 쵸슈가 이끌던 신일본과 다카다가 에이스였던 UWF인터내셔널(Union of Professional Wrestling Force International)이 전면전쟁으로 격돌 96년까지 근 1년여간 격렬하게 싸워댔죠. 

음... 신일본과 UWF의 관계가 안좋다기 보다는... 각 집단의 주도층간의 갈등이 좀 심화됐던 건 아닌가 싶네요. 

일단 1차 UWF의 탄생부터가 신일본과의 갈등이니깐요. 그리고 2차 UWF의 탄생전에도 마에다와 이노키-일본 프런트간의 갈등은 지속됐던 듯 합니다. 특히 마에다는 그 스타일에 대한 고집이 쎄서 외국인들이 잘 상대하기를 꺼렸다고 하죠. 발차기가 아프니까. 그 와중에 마에다-안드레 시멘트 사건도 일어나고... 말도 잘 안들으면서 신일본의 상징인 이노키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 분위기를 풍겼으니... (직전 대결을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일본-UWF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슬슬 매너리즘화 되어갈 때쯤 타이밍 좋게 쵸슈를 데려와 새로운 것을 할려고 했던 듯... 어쩌면 마에다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을 수도... 아무튼 그렇게 친하지 않으면서 색깔이 짙은 쵸슈와 마에다. 불과 불이 만나서 결국 터진거죠. 

마에다가 2차 U를 준비하면서 다카다, 야마자키 등 신일본이 사실상 소속으로 집어넣을려면 유망한 인재들을 빼내간 것도 신일본으로서는 열받는 일이었죠. 그 이후에 후지와라에 당시 촉망받는 에이스 후보였돈 후나키 마사카츠와 스즈키 미노루까지 데려갔으니...(후나키는 신일본이 끝까지 잡을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안가면 성룡과의 대결을 실현시켜주겠다는 거였다네요.)

이렇듯 시작이나 과정이나 끝이나 도통 좋지가 못했던 거죠. 그리고 U와 신일본의 마지막 접촉이었던 신일본 vs U인터 전면전쟁. 당시 흥행적으로 고전을 면치못하던 U인터. 고민끝에 타개책으로 선택한 것이 신일본과의 대항전이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대항전의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UWF 알러지를 가지고 있다는 현장 감독 쵸슈 리키. 다카다 노부히코의 살짝 폭로본인 '울보'에 나와있는 내용으로는 이 때도 주도한 것은 신일본측으로 당시 U인터의 최강으로 여겨지던 다카다를 10.9 토쿄돔에서 무토에게 지게 만든 것도 이후 U인터 이미지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신일본 측은 일단 무토에게 진 뒤에 재전에서 타이틀을 건네주고(96.1.4 토쿄돔. 여기까지는 실행) 뒤 이어 스트롱 스타일을 표방하는 켄스케, 하시모토 등의 강호들을 상대로 방어하게 해주겠다고 했다지만 결국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하시모토에게 지게끔 만들었다죠. 그래서 이 대항전도 시작한 지 채 1년이 안되게 96년 8월 사쿠라바-오오타니戰을 끝으로 사실상 종료. 신일본이 이런점은 고쳐야하는데... 시작은 업무제휴였지만 결국은 부수기에 들어가려던 거였던 게 아닐런지... 

아무튼 양측의 관계는 그런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원래 같은 뿌리에게 자라 끊임없지 갈등하다가... 결국 하나가 망하고... 지금도 다카다 나부히코가 총괄본부장으로 버키고 있는 PRIDE와 신일본은 하이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이노키와 다카다의 결별 이유는... 음... 확실히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그 시기쯤에 군대를 가서 이건 확실히 모르겠네요. 아마도 2002년 가을부터 시작된 이노키측과 DSE-FEG간의 갈등으로부터 뭔가가 시작된 게 아닐런지...  
 
 

 

 

카즈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카다 때문에 UWF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결국 그런 일이있었군요... 
신일본과 UWF의 관계라... 처음부터 얽히고 설힌관계였군요... 처음알았습니다 최근에 다카다가 
이번 PRIDE 무차별급 GP에서 후지타 카즈유키에게 오퍼를 할려고 한다는 걸 들은 것 같더군요... 
다시한번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2006-04-10
22:34:38
 

 

王者의魂 
  후지타에 대한 요청이 그만큼 열렬하다는 소리는 즉, 후지타와 이노키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아 참, 소원해진 정도가 아니죠. 이미 후지타는 이노키와 결별했습니다. 이노키 오피스 자체는 이미 운영이 중단된 상태이고, 후지타는 후지타 오피스라는 단독 대행사를 만들었습니다. 켄스케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노키 등에게 자신의 일정을 x같이 관리당할 필요도 없어졌고, 프로레슬링을 하건 히어로즈를 가건 프라이드를 가건 이제 본인의 자유가 되었습니다.

by Cactus™ | 2009/06/27 13:33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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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공국진 at 2009/07/02 15:15
저 시합에서 기억나는 건 우에다 때문에 마에다가 이노키와 더 싸워보지 못한 장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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