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08일
UWF
UWF
UWF (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는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 중 하나였다. 격투 노선의 프로레슬링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설립 시기에 의해 제 1차와 2차로 나누어진다. 당초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치온 부흥을 목표로 설립 되었지만, 이합집산을 반복해, 제 2차 UWF 붕괴 이후에는 분파한 단체간/개인 사이에 비방과 중상이 빈발했다. 이 UWF 사상에서 태어난 격투 단체를 총칭해 U계라고 부른다.
제 1차 UWF
1. 개요 :
팬 및 전문지에서는 구 UWF라고도 불린다. 또 소속 선수에게는 유니버설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제 1차 UWF는 1984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영업 본부장이던 신마 히사시를 중심으로, 같은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마에다 아키라와 같이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붕괴한 국제 프로레슬링의 러셔 키무라, 고 류마, 그란 하마다, 마하 하야토 등에 의해서 시작할 수 있었다.
2. 설립 까지의 경위 :
UWF 설립 뒤에는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으킨 사업 "안톤 하이 셀"의 실패에 의해 막대한 부채를 안고 그 빚을 메꾸기 위해 신일본에서 얻은 수익의 자금을 유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발단하는 집안 싸움 (신일 쿠데타 사건)이 원인이다. 이 소동에 의해, 이노키 파였던 신마 히사시 영업 본부장과 반 이노키 사원이 반목. 신마가 이노키의 새로운 인수태세로서 준비한 것이 유니버설 레슬링 연맹, 통칭 "UWF"이다.
그러나 신마는 "쿠데타를 기획한 주모자"로서 영업 본부장에서 해임되어 동시에 이노키도 대표이사 사장을 일시적으로 해임. 쿠데타는 미수로 끝났다. 그런 경위로 시작되어, 설립 전에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포함한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러의 참가가 알려져 개양전의 포스터에도 당시 신일의 주력 선수들이나 주력 외국인 레슬러들의 사진이 실렸지만 ("나는 벌써 수십명의 레슬러를 확보했다."라는 문구도 적힌), 결과적으로 마에다 아키라를 시작해 준 메인 이하 레벨의 레슬러가 개양에 참가하는 것으로 끝났다.
또한 마에다는 "이노키씨가 '나도 나중에 갈거니까 먼저 가줘.'라고 해서 이적했다". 라고 후에 이야기 했다. 또 사야마 사토루는 후일 남성 잡지의 연재기사에서 사건 경위의 내막을 폭로했다.
외국인 레슬러에 관해서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자이언틔 바바의 루트로 테리 펑크가 창구가 되어 선수를 알선하려 했다. 이것은 개양전에 신마가 바바에게 "이노키와 UWF를 만들지만 이것을 계기로 외국인 빼내기 전쟁이 재연되지 않게 외국인 루트로 협력해 주세요".라고 의뢰했기 때문에 마크 루인, 카리프스 허리케인이 등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활동했던 외국인 레슬러가 UWF에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노선 :
개양전은 1984년 4월 11일 사이타마현 오미야 스케이트 센터에서 행해졌다. 개양전의 포스터에 게재되던 이노키를 시작으로 당시 신일의 주력 선수들, 헐크 호건, 앙드레 자이언트 등 당시의 신일의 톱 외국인 레슬러들은 아무도 출장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런 선수들의 입장을 기대한 팬들의 욕설이나, 시합에 관계없는 선수 콜이 발생하는 등, 파란의 스타트였다.
개양 시리즈는 노선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마에다의 스승격인 후지와라 요시아키가 타카다 노부히코를 데리고 참가한 무렵부터 방향성이 정해져, 도장에서 행해지는 스파링과 같은 관절기 위주의 공방을 중심으로 한 레슬링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초슈 리키가 이끄는 유신군과 군단 항쟁이 격화. 순수 프로레슬링 노선을 더욱 가열화 하던 중, UWF에선 1984년 7월 23일, 24일의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UWF 무한대기념일" 대회에, 은퇴했던 초대 타이거 마스크가 더 타이거로 출장하게 된다. 천재 레슬러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던 많은 팬들은 이에 열광. 대회가 성공한 후에도 일부 프로레슬링 매스컴과 팬의 강력한 지지도 있어, 더 타이거는 신일본 탈퇴 후 자신의 체육관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야마자키 카즈오를 데리고 계속 참전하게 되어, 8월 4일 정식으로 UWF에 입단했다.
후일 신일본을 탈퇴했던 키도 오사무도 합류. 기본이 되는 UWF의 진용을 이것으로 굳어졌다. 덧붙여 사야마는 복귀 조건으로 일부 프런트의 추방을 원했고, 이에 의해 신마 히사시는 정식으로 UWF에서 손을 떼었다. 이 때, 신마를 따라 그란 하마다가 이탈했다.
덧붙여 그들은 모두 당시 "전설의 스트롱 스타일 레슬러"로서 팬들 사이에서 신격화되던 칼 고치 문하생이어서, 고치가 그들을 지도한 것도 인기에 박차를 가했다. 또 고치의 사위인 마사미츠도 심판 겸 레슬러로서 참가했다. 고치도 제자들이 모인 UWF에 대해 기뻐했으며, 죠 말렌코 등의 선수 파견 등의 협력을 약속. 여기에 UWF가 목표로 하는 레슬링=고치류 스트롱 스타일이라는 일종의 라인이 완성된다.
사야마는 링네임을 슈퍼 타이거로 고치고 9월 7일 코라쿠엔 홀의 "UWF 실력 No.1 결정전" 제1라운드로 후지와라를, 9월 11일 코라쿠엔에서 제2라운드로 마에다를 꺾어 "실력No.1"의 칭호를 획득. 시합은 싱글이 대부분, 로프 워크를 하지않고 상대의 기술을 쉽게 받지 않는 등 종래의 프로레슬링이 가진 쇼적 요소를 없애고, "킥이 급소에 온전히 들어가면 누구라도 온전히 서있을 수 없다.", "관절기가 들어가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다." 라는 격투색 강한 레슬링을 전개. 종래의 프로레슬링에 질린 팬들은 UWF가 표방하는 노선을 지지하여 일부 "UWF 신자"라 불리는 열광적인 팬을 낳았다. 사야마의 UWF 이적 문제로 우라타 노보루사장이 체포되는 등 스캔들도 보도되지만, UWF는 이후에도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셔 키무라, 고 류마가 "빅토리 위크스"시리즈 후에 이탈한다. 고치류 스트롱 스타일 노선을 싫어했다는 것이 이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시리즈 전후에 사야마나 고치가 합류한 도장 합동 연습에서도 그들이 우호적으로 참가했던 것은 잡지 기획으로 취재하러 왔던 見栄晴의 리포트에서도 소개되고 있고, 또 당사자들이 후에 이탈의 이유에 대해 "외국인 레슬러의 부킹 창구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트러블이 이유이며, 격투기 노선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었다. 덧붙여 프로레슬링 비판의 강도를 높여갔던 사야마, 마에다, 후지와라 등의 키무라나 고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문제는 프로레슬링 매스컴 및 일부 UWF 신자가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사야마의 참전은, 실은 UWF에 있어서 양날의 컴이었다. 사야마는 원래 새로운 스타일의 프로레슬링을 모색해, 그 프로듀스를 다루는 것에 열의를 보였으며, 서서히 시합 룰 등에 참견하게 되었고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야마는 최초로 시도한 후지와라와 노 폴 매치를 실시해 승리, 1985년에는 소속 레슬러의 전적을 놓고 실력을 가늠하는 리그전을 개최, 랭킹 제도를 도입해 2군제를 도입했다. "반칙을 보다 명확히 한다.", "폴은 누르기와 브릿지 폴만 인정한다.", "감점 포인트제를 도입해, 로프 이스케이프를 반복해 포인트가 없어진 시점에서 패배가 된다.", "선수 안전을 위해 레가스 착용 이외의 발등에 의한 킥은 반칙으로 한다 (통상의 프로레슬링용 링 슈즈를 착용 혹은 맨발인 채로 발등으로 상대를 차면 반칙이 된다.)." 등 하나의 스포츠로서 보는 일부 팬들에게서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너무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한 탓에 사야마 이외의 선수들은 서서히 불만이 쌓여갔다.
4. 붕괴 :
"티비 방송이 되지 않으면 단체 운영이 될 수 없다." 라는 공식이 있었던 시절, UWF는 티비 프로가 없었다. 개양 당초, 후지 티비에서 방송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그 후 TBS가 방송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것도 여러 문제로 흐지부지되어, 최종적으로는 티비 도쿄 프로그램인 "세계의 프로레슬링"으로 일부 시합이 방송되지만 방송국의 규모가 작은 탓에 송출국도 적어서 어필하기엔 불충분했다.
어필도나 방송으로 들어오는 방영권료도 없어 자금융통에 힘겨워 하던 중, 스폰서였던 토요타 상사 (일시적으로 단체 명을 "해외 UWF"로 칭했던 적도 있다.)의 나가노 카즈오 회장이 살해되는 등 자금 융통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된다.
또 링 안에서는, 목표 하는 스타일의 문제 및 사야마가 UWF의 실권을 잡아 자신에게 맞게 단체 개혁을 추진하여 사야마와 다른 선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갔다. 1985년 9월 2일 오사카 후리츠 임해 스포츠 센터에서 열린 제 2회 공식 리그전에서, 마에다가 사야마에 시멘트를 건 것으로, 마침내 불협화음이 표출되어버렸다. 사야마는 마에다의 차기가 자신의 하복부에 맞았다며 심판에게 반칙을 주장. 마에다의 반칙패가 되지만, 실제로 하복부에 맞지 않고, 사야마가 일방적으로 시합을 끝낸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 후 마에다는 결장. 이 사건은 사야마도 동시에 프로레슬링계를 떠나, 자신이 표방하는 새로운 격투기 "슈팅 (후일 수두)" 창설에 힘을 쏟게 된다.
신일본으로 일시 귀환
UWF 붕괴 후, 1985년 말 마에다, 후지와라, 키도, 타카다, 야마자키 등 일부 레슬러는 업무 제휴의 형태로 옛 터전인 신일본에 전격 복귀. 마에다는 인사차 온 신일본의 링 위에서 "1년 반 동안 UWF로 달려온 것이 어떤 것인가 확인하러 왔습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고, 신일본세와 안이한 융합을 부정하고 대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덧붙여 붕괴 당시에 마에다는 자이언트 바바에게 전일본 프로레슬링 이적을 권유받았지만, 전일본이 원했던 것은 마에다와 타카다의 두 명 뿐이었기에 마에다는 다른 레슬러들을 생각하여 거부했다.
새해가 되어, 신일본의 요구에 의해 이노키에 대한 도전권을 놓고 UWF 선수 내에서의 리그전이 열렸다. 최종적으로 마에다와 후지와라가 싸워, 마에다가 슬리퍼 홀드로 후지와라가 입에서 거품을 물고 실신한 것으로 보였지만, 후지와라도 동시에 마에다의 다리를 레그락으로 잡고 있어 이긴 것은 마에다에게 기브업을 얻어 낸 후지와라였다. 2월 6일 양국 국기관에서 이노키 대 후지와라전에서 후지와라가 진 후 링에 난입한 마에다가 이노키의 턱에 강렬한 하이킥을 날려 이노키가 다운. 마에다는 이노키가 너클로 턱에 맞히고 후지와라를 슬리퍼 홀드로 실신시킨 것에 격앙하여 "이노키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신일본과 UWF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UWF 스타일을 버리지 않고 신일본세에 정면으로 이데올로기 대결을 도전. 서로 다른 스타일이 대결하는 아슬아슬한 전개 (실제로는 신일세가 로프 반동을 이용하지 않는 UWF 스타일로 싸움을 강요당했다.)는, 초대 타이거 마스크의 은퇴와 초슈 리키가 이끄는 유신군의 대량 이탈 등으로 한때 수세에 몰렸던 신일본은 다시 열기를 띄면서 팬들도 복귀한 UWF세를 환영했다.
그 중 지금까지 구전되는 명승부와 명장면이 많이 만들어져 3월 26일 도쿄 체육관에서 신일본 대 UWF의 5대5 엘리미네이션 매치를 했다. 4월 29일 츠시 체육관에서 마에다 대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시멘트 매치는 마에다를 망치기 위해서 신일본이 앙드레를 보냈다. 이 시합은 티비 수록이 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이상한 시합이 되어 정식 방영하지 않았다. 마에다는 "해치워도 좋습니까."라고 몇번이나 세컨드에 확인하고 (주 1)결과적으로 앙드레를 전의 상실에 몰아넣었다. 10월 9일 양국 국기관에서 2대 이종 격투기전에서 행해진 마에다 대 돈 나카야 닐슨전에서 극적인 승리로 마에다는 이노키를 대신해 "신 격투왕"의 칭호를 얻었다. 타카다 노부히코와 전일본에서 넘어온 코시나가 시로의 IWGP 주니어 헤비급 타이틀을 둘러싼 대결을 중심으로 한 주니어 전선도 (제 2기 주니어 황금기)큰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필 된 시합은 1986년 6월 12일 오사카성 홀에서 행해진 IWGP 공식 리그전, 마에다 대 후지나미 타츠미의 싱글 매치를 들 수 있다. 마에다는 초반부터 강렬한 킥을 안면이나 가슴팍에 퍼부어 후지나미를 압도하나, 후지나미도 이에 지지 않고 정면으로 덤벼왔다. 코너에 몰린 후지나미를 대차륜 킥으로 공격해 후지나미의 이마에서 유혈 (주 2). 마지막에는 스스로 로프 반동을 하는 UWF세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을 취했다. 마에다가 사용한 플라잉 닐 킥과 후지나미의 점핑 하이킥이 공중에서 교차. 양자 후두부로 떨어진 더블 KO라는 장렬한 결말이 되었다. 이 대결 후 마에다는 "무인도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동료가 있었다."라고 말해, 외관에서는 UWF세와 신일본의 이데올로기 싸움의 종료가 다가오는 듯 했다.
그 후 1987년 들어 전일본에서 활동했던 초슈 등 저팬 프로레슬링세가 신일본에 전격 복귀. 이즈음부터 서서히 UWF세는 변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6월 12일 양국 국기관에서 IWGP 리그전 결승 이노키 대 마사 사이토전에서 이노키가 4연패를 달성한 후 이노키 세대에 의해 링 위가 장식 되는 것에 초조한 초슈가 마에다를 설득해, 링 위에 후지나미/마에다를 불러내 세대 투쟁을 어필. 이에 마에다가 "세대 투쟁이든 뭐든, 누가 제일 강한지 정해질 때 까지 하면 돼. 정해질 때까지!"라고 호응. 이노키, 마사 사이토 등 구세대군과 초슈, 후지나미, 마에다를 중심으로 한 신세대군의 싸움이 시작되어 UWF 존재 의의는 형태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그리고 이 싸움의 주동자인 초슈의 신세대군 해산 선언으로 구세대군과 싸움의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 그리고 마사 사이토가 이노키와 공투를 싫어해 다시 싸우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저팬세와 UWF세 사이에 대립이 생겨, 마침내 11월 19일 코라쿠엔 홀의 유신군 대 UWF의 6인 태그 매치에서 마에다가 초슈가 방어를 할 수 없는 배후에서 안면을 향해 걷어 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에다 안면축격사건"을 일으켰다. 초슈는 오른쪽 이마동저골절의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어,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암묵의 룰인 "고의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공격은 해서는 안된다."라는 금기를 어긴 마에다는 그 행위를 내외로부터 문제시되어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 해제 조건으로 멕시코 원정을 선고받지만 이를 거부. 1988년 2월 1일부로 신일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는다.
제 2차 UWF
1. 개요 :
팬 및 전문지에서는 신생 UWF 또는 신 UWF로 불린다. 1988년 마에다 아키라에 의해 개양된 프로레슬링 단체. 구 UWF는 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의 약칭인데 반해, 신생 UWF는 Union of Wrestling Force의 약칭이며, 후에 UWF 인터네셔널이 이 명칭을 계승하고 있다.
구 UWF는 스폰서를 구하는데 어려움으로 인해 붕괴했지만, 신일본과 제휴 시에 UWF 스타일을 티비를 통해 어필했던 것으로 전국적으로 팬의 지지를 얻는 것에 성공해, 같은 해 5월의 코라쿠엔 홀에서 개양전의 티켓이 불과 15분 만에 완매하는 등, 개양 전부터 비정상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양전을 하는 삿포로 대회 이틀 전부터 회사를 쉬고 휴가를 오는 팬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가 가열되었으며, 레이저 라이트에 의한 회장 연출, 달에 1회 흥행과 시합 비디오의 판매로 수익을 낸다는 기존 프로레슬링과는 다른 새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초부터 흥행도 기존의 시리즈 순회 형식이 아니고, 달 1회의 단발 형식으로 줄여 각지의 주요 회장을 도는 빅 매치 형식을 채용해, 연전에 의한 선수의 컨디션 저하를 예방했다. UWF의 시합은 킥에 의한 하드 히트를 반복하기에, 컨디션 유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는 말도 있다. 대회마다 기념 상품을 만들거나 전의 대회를 완전 수록한 비디오를 다음 대회에서 재빨리 판매하는 것으로 수익을 늘려 적은 흥행 수를 보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선수들의 질 높은 시합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어, 팬들 사이에서도 "빨리 UWF를 보고 싶다면 밀항해서라도 회장에 갈 수밖에 없다."라는 긴박감을 자극해, 대 성공을 거둔다.
이후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 슛 복싱과 합동 흥행 "한여름의 격투기전"의 메인에 마에다 대 제럴드 골드전을 벌여 성공. 이후에도 대회를 열 때마다 티켓 완매 기록이 계속되어 당시 다소 어려움을 겪던 프로레슬링계에서 유일하게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며 독주했다. 나중에는 룰의 정비에도 착수해, 제 1차 UWF에서 시험했던
- 시합은 모두 싱글 매치 단판 승부.
- 승패는 KO 혹은 기브업 만으로 핀폴 없음.
- 5회 다운. 3회의 로프 이스케이프로 1번 다운으로 인정. 포인트를 모두 잃으면 TKO패가 된다.
라는 기본적인 골조를 결정. 타카다, 야마자키가 빠른 속도로 마에다에 필적하는 힘을 길러내, 단체 내의 파워 밸런스도 안정된다. 그 후 밥 백런드 대 타카다 전이나, 오사카 구장에서 마에다 대 크리스 도어맨의 경기 등으로 화제를 만들어 냈다.
1989년 들어 신일본을 탈퇴한 스즈키 미노루, 후지와라 요시아키, 후나키 마사카츠가 입단해, 선수 층이 더욱 두터워져, 같은 해 11월에는 도쿄돔에 진출 (대회 명은 U-COSMOS). 티켓 발매일에만 4만 장의 판매를 기록. 최종적으로 6만명을 동원했다.
제 2차 UWF는 노먼 스마일리, 맥 로쉬, 바트 베일, 자니 바렛트, 웰링톤 윌킨스 Jr., 딕 레옹 프라이 등 단골 외국인 선수도 있었지만, 너무 어려운 시합과 외국인 초빙에 드는 경비 문제로 좀처럼 정착하는 외국인 선수는 없었고, 일본인 선수가 충실한 덕에 대부분 시합은 일본인 대결로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제 2차 UWF는 순조롭게 운영되는듯 했지만, 안경 슈퍼의 프로레슬링 참가로 프런트와 선수 사이에 불협 화음이 생기면서 SWS 소속 선수를 링에 올릴지 말지로 마에다와 신 신지사장이 대립. 프런트가 모든 선수를 해고하는 것으로 끝나, 1990년 12월 나가노 대회에서 후나키 마사카츠의 요청에 의해 결장 중인 마에다를 포함한 모든 선수가 링에 모여 만세 삼창. 선수의 일치단결을 어필하여 신단체 설립의 느낌을 주었지만, 이를 끝으로 흥행은 끝났다.
그 후 선수 주체로 신단체 (당시 일반적으로 "제 3차 UWF"로도 불리었다.)를 설립할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각 선수의 방향성의 대립으로 결렬. 1991년에 신 UWF 후지와라 조, UWF 인터네셔널, 링스의 3 단체로 갈라졌다.
소속 선수
제 1차, 2차 모두 소속 :
마에다 아키라
후지와라 요시아키
타카다 노부히코
야마자키 카즈오
나카노 타츠오
안조 요지
미야토 시게오 (미야토 마사미츠)
제 1차만 소속 :
러셔 키무라
고 류마
마하 하야토 (초대)
그란 하마다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
키도 오사무
空中 마사미츠(제 2차에서는 심판)
히로마츠 사토시
칸다 히데노부
호시나 히로시
모리 야스시
오카모토 츠요시 (브루저 오카모토)
제 2차만 소속 :
후나키 마사카츠
스즈키 미노루
타무라 키요시
후케 유스케 (후케 타카쿠)
카키하라 마사히토
나가이 히로카즈 (나가이 미츠야)
나이토 카메야마
주요 타이틀
1. 제 1차 :
UWF 헤비급 타이틀 : 벨트 가운데 UWF가 새겨진 타이틀. 당초 WWF (현 WWE)인터네셔널 헤비급 타이틀이었지만, 완전히 같은 이름의 타이틀이 신일에 존재해, 같은 이름의 타이틀이 두개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 후 신마 히사시가 UWF를 떠나면서 WWF와 관계도 끝나, UWF 헤비급 타이틀이 되었지만, 챔피언인 마에다는 거의 방어전도 하지 않고 타이틀은 자연 소멸.
2. 제 2차 :
특별히 타이틀을 마련하지 않았다.
※ 주 1 : 마에다에 의하면 "(시멘트를) 하면 어느 한쪽이 큰 부상을 입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저쪽은 시멘트를 걸어왔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또한 앙드레의 세컨드에는 와카마츠 이치마사.
※ 주 2 : 이 후지나미의 유혈 사건에 대해서는 마에다가 은퇴 후 해명. 레가스 아래에 신고있던 슈즈의 쇠장식이 피를 냈다고 말했다. 또 당시 심판을 보던 미스터 타카하시도 저서에서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명언했다.
空中 마사미츠 이름좀 제대로 번역 부탁드립니다.
UWF (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는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 중 하나였다. 격투 노선의 프로레슬링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설립 시기에 의해 제 1차와 2차로 나누어진다. 당초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치온 부흥을 목표로 설립 되었지만, 이합집산을 반복해, 제 2차 UWF 붕괴 이후에는 분파한 단체간/개인 사이에 비방과 중상이 빈발했다. 이 UWF 사상에서 태어난 격투 단체를 총칭해 U계라고 부른다.
제 1차 UWF
1. 개요 :
팬 및 전문지에서는 구 UWF라고도 불린다. 또 소속 선수에게는 유니버설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제 1차 UWF는 1984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영업 본부장이던 신마 히사시를 중심으로, 같은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마에다 아키라와 같이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붕괴한 국제 프로레슬링의 러셔 키무라, 고 류마, 그란 하마다, 마하 하야토 등에 의해서 시작할 수 있었다.
2. 설립 까지의 경위 :
UWF 설립 뒤에는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으킨 사업 "안톤 하이 셀"의 실패에 의해 막대한 부채를 안고 그 빚을 메꾸기 위해 신일본에서 얻은 수익의 자금을 유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발단하는 집안 싸움 (신일 쿠데타 사건)이 원인이다. 이 소동에 의해, 이노키 파였던 신마 히사시 영업 본부장과 반 이노키 사원이 반목. 신마가 이노키의 새로운 인수태세로서 준비한 것이 유니버설 레슬링 연맹, 통칭 "UWF"이다.
그러나 신마는 "쿠데타를 기획한 주모자"로서 영업 본부장에서 해임되어 동시에 이노키도 대표이사 사장을 일시적으로 해임. 쿠데타는 미수로 끝났다. 그런 경위로 시작되어, 설립 전에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포함한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러의 참가가 알려져 개양전의 포스터에도 당시 신일의 주력 선수들이나 주력 외국인 레슬러들의 사진이 실렸지만 ("나는 벌써 수십명의 레슬러를 확보했다."라는 문구도 적힌), 결과적으로 마에다 아키라를 시작해 준 메인 이하 레벨의 레슬러가 개양에 참가하는 것으로 끝났다.
또한 마에다는 "이노키씨가 '나도 나중에 갈거니까 먼저 가줘.'라고 해서 이적했다". 라고 후에 이야기 했다. 또 사야마 사토루는 후일 남성 잡지의 연재기사에서 사건 경위의 내막을 폭로했다.
외국인 레슬러에 관해서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자이언틔 바바의 루트로 테리 펑크가 창구가 되어 선수를 알선하려 했다. 이것은 개양전에 신마가 바바에게 "이노키와 UWF를 만들지만 이것을 계기로 외국인 빼내기 전쟁이 재연되지 않게 외국인 루트로 협력해 주세요".라고 의뢰했기 때문에 마크 루인, 카리프스 허리케인이 등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활동했던 외국인 레슬러가 UWF에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노선 :
개양전은 1984년 4월 11일 사이타마현 오미야 스케이트 센터에서 행해졌다. 개양전의 포스터에 게재되던 이노키를 시작으로 당시 신일의 주력 선수들, 헐크 호건, 앙드레 자이언트 등 당시의 신일의 톱 외국인 레슬러들은 아무도 출장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런 선수들의 입장을 기대한 팬들의 욕설이나, 시합에 관계없는 선수 콜이 발생하는 등, 파란의 스타트였다.
개양 시리즈는 노선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마에다의 스승격인 후지와라 요시아키가 타카다 노부히코를 데리고 참가한 무렵부터 방향성이 정해져, 도장에서 행해지는 스파링과 같은 관절기 위주의 공방을 중심으로 한 레슬링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초슈 리키가 이끄는 유신군과 군단 항쟁이 격화. 순수 프로레슬링 노선을 더욱 가열화 하던 중, UWF에선 1984년 7월 23일, 24일의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UWF 무한대기념일" 대회에, 은퇴했던 초대 타이거 마스크가 더 타이거로 출장하게 된다. 천재 레슬러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던 많은 팬들은 이에 열광. 대회가 성공한 후에도 일부 프로레슬링 매스컴과 팬의 강력한 지지도 있어, 더 타이거는 신일본 탈퇴 후 자신의 체육관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야마자키 카즈오를 데리고 계속 참전하게 되어, 8월 4일 정식으로 UWF에 입단했다.
후일 신일본을 탈퇴했던 키도 오사무도 합류. 기본이 되는 UWF의 진용을 이것으로 굳어졌다. 덧붙여 사야마는 복귀 조건으로 일부 프런트의 추방을 원했고, 이에 의해 신마 히사시는 정식으로 UWF에서 손을 떼었다. 이 때, 신마를 따라 그란 하마다가 이탈했다.
덧붙여 그들은 모두 당시 "전설의 스트롱 스타일 레슬러"로서 팬들 사이에서 신격화되던 칼 고치 문하생이어서, 고치가 그들을 지도한 것도 인기에 박차를 가했다. 또 고치의 사위인 마사미츠도 심판 겸 레슬러로서 참가했다. 고치도 제자들이 모인 UWF에 대해 기뻐했으며, 죠 말렌코 등의 선수 파견 등의 협력을 약속. 여기에 UWF가 목표로 하는 레슬링=고치류 스트롱 스타일이라는 일종의 라인이 완성된다.
사야마는 링네임을 슈퍼 타이거로 고치고 9월 7일 코라쿠엔 홀의 "UWF 실력 No.1 결정전" 제1라운드로 후지와라를, 9월 11일 코라쿠엔에서 제2라운드로 마에다를 꺾어 "실력No.1"의 칭호를 획득. 시합은 싱글이 대부분, 로프 워크를 하지않고 상대의 기술을 쉽게 받지 않는 등 종래의 프로레슬링이 가진 쇼적 요소를 없애고, "킥이 급소에 온전히 들어가면 누구라도 온전히 서있을 수 없다.", "관절기가 들어가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다." 라는 격투색 강한 레슬링을 전개. 종래의 프로레슬링에 질린 팬들은 UWF가 표방하는 노선을 지지하여 일부 "UWF 신자"라 불리는 열광적인 팬을 낳았다. 사야마의 UWF 이적 문제로 우라타 노보루사장이 체포되는 등 스캔들도 보도되지만, UWF는 이후에도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셔 키무라, 고 류마가 "빅토리 위크스"시리즈 후에 이탈한다. 고치류 스트롱 스타일 노선을 싫어했다는 것이 이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시리즈 전후에 사야마나 고치가 합류한 도장 합동 연습에서도 그들이 우호적으로 참가했던 것은 잡지 기획으로 취재하러 왔던 見栄晴의 리포트에서도 소개되고 있고, 또 당사자들이 후에 이탈의 이유에 대해 "외국인 레슬러의 부킹 창구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트러블이 이유이며, 격투기 노선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었다. 덧붙여 프로레슬링 비판의 강도를 높여갔던 사야마, 마에다, 후지와라 등의 키무라나 고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문제는 프로레슬링 매스컴 및 일부 UWF 신자가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사야마의 참전은, 실은 UWF에 있어서 양날의 컴이었다. 사야마는 원래 새로운 스타일의 프로레슬링을 모색해, 그 프로듀스를 다루는 것에 열의를 보였으며, 서서히 시합 룰 등에 참견하게 되었고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야마는 최초로 시도한 후지와라와 노 폴 매치를 실시해 승리, 1985년에는 소속 레슬러의 전적을 놓고 실력을 가늠하는 리그전을 개최, 랭킹 제도를 도입해 2군제를 도입했다. "반칙을 보다 명확히 한다.", "폴은 누르기와 브릿지 폴만 인정한다.", "감점 포인트제를 도입해, 로프 이스케이프를 반복해 포인트가 없어진 시점에서 패배가 된다.", "선수 안전을 위해 레가스 착용 이외의 발등에 의한 킥은 반칙으로 한다 (통상의 프로레슬링용 링 슈즈를 착용 혹은 맨발인 채로 발등으로 상대를 차면 반칙이 된다.)." 등 하나의 스포츠로서 보는 일부 팬들에게서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너무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한 탓에 사야마 이외의 선수들은 서서히 불만이 쌓여갔다.
4. 붕괴 :
"티비 방송이 되지 않으면 단체 운영이 될 수 없다." 라는 공식이 있었던 시절, UWF는 티비 프로가 없었다. 개양 당초, 후지 티비에서 방송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그 후 TBS가 방송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것도 여러 문제로 흐지부지되어, 최종적으로는 티비 도쿄 프로그램인 "세계의 프로레슬링"으로 일부 시합이 방송되지만 방송국의 규모가 작은 탓에 송출국도 적어서 어필하기엔 불충분했다.
어필도나 방송으로 들어오는 방영권료도 없어 자금융통에 힘겨워 하던 중, 스폰서였던 토요타 상사 (일시적으로 단체 명을 "해외 UWF"로 칭했던 적도 있다.)의 나가노 카즈오 회장이 살해되는 등 자금 융통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된다.
또 링 안에서는, 목표 하는 스타일의 문제 및 사야마가 UWF의 실권을 잡아 자신에게 맞게 단체 개혁을 추진하여 사야마와 다른 선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갔다. 1985년 9월 2일 오사카 후리츠 임해 스포츠 센터에서 열린 제 2회 공식 리그전에서, 마에다가 사야마에 시멘트를 건 것으로, 마침내 불협화음이 표출되어버렸다. 사야마는 마에다의 차기가 자신의 하복부에 맞았다며 심판에게 반칙을 주장. 마에다의 반칙패가 되지만, 실제로 하복부에 맞지 않고, 사야마가 일방적으로 시합을 끝낸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 후 마에다는 결장. 이 사건은 사야마도 동시에 프로레슬링계를 떠나, 자신이 표방하는 새로운 격투기 "슈팅 (후일 수두)" 창설에 힘을 쏟게 된다.
신일본으로 일시 귀환
UWF 붕괴 후, 1985년 말 마에다, 후지와라, 키도, 타카다, 야마자키 등 일부 레슬러는 업무 제휴의 형태로 옛 터전인 신일본에 전격 복귀. 마에다는 인사차 온 신일본의 링 위에서 "1년 반 동안 UWF로 달려온 것이 어떤 것인가 확인하러 왔습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고, 신일본세와 안이한 융합을 부정하고 대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덧붙여 붕괴 당시에 마에다는 자이언트 바바에게 전일본 프로레슬링 이적을 권유받았지만, 전일본이 원했던 것은 마에다와 타카다의 두 명 뿐이었기에 마에다는 다른 레슬러들을 생각하여 거부했다.
새해가 되어, 신일본의 요구에 의해 이노키에 대한 도전권을 놓고 UWF 선수 내에서의 리그전이 열렸다. 최종적으로 마에다와 후지와라가 싸워, 마에다가 슬리퍼 홀드로 후지와라가 입에서 거품을 물고 실신한 것으로 보였지만, 후지와라도 동시에 마에다의 다리를 레그락으로 잡고 있어 이긴 것은 마에다에게 기브업을 얻어 낸 후지와라였다. 2월 6일 양국 국기관에서 이노키 대 후지와라전에서 후지와라가 진 후 링에 난입한 마에다가 이노키의 턱에 강렬한 하이킥을 날려 이노키가 다운. 마에다는 이노키가 너클로 턱에 맞히고 후지와라를 슬리퍼 홀드로 실신시킨 것에 격앙하여 "이노키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신일본과 UWF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UWF 스타일을 버리지 않고 신일본세에 정면으로 이데올로기 대결을 도전. 서로 다른 스타일이 대결하는 아슬아슬한 전개 (실제로는 신일세가 로프 반동을 이용하지 않는 UWF 스타일로 싸움을 강요당했다.)는, 초대 타이거 마스크의 은퇴와 초슈 리키가 이끄는 유신군의 대량 이탈 등으로 한때 수세에 몰렸던 신일본은 다시 열기를 띄면서 팬들도 복귀한 UWF세를 환영했다.
그 중 지금까지 구전되는 명승부와 명장면이 많이 만들어져 3월 26일 도쿄 체육관에서 신일본 대 UWF의 5대5 엘리미네이션 매치를 했다. 4월 29일 츠시 체육관에서 마에다 대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시멘트 매치는 마에다를 망치기 위해서 신일본이 앙드레를 보냈다. 이 시합은 티비 수록이 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이상한 시합이 되어 정식 방영하지 않았다. 마에다는 "해치워도 좋습니까."라고 몇번이나 세컨드에 확인하고 (주 1)결과적으로 앙드레를 전의 상실에 몰아넣었다. 10월 9일 양국 국기관에서 2대 이종 격투기전에서 행해진 마에다 대 돈 나카야 닐슨전에서 극적인 승리로 마에다는 이노키를 대신해 "신 격투왕"의 칭호를 얻었다. 타카다 노부히코와 전일본에서 넘어온 코시나가 시로의 IWGP 주니어 헤비급 타이틀을 둘러싼 대결을 중심으로 한 주니어 전선도 (제 2기 주니어 황금기)큰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필 된 시합은 1986년 6월 12일 오사카성 홀에서 행해진 IWGP 공식 리그전, 마에다 대 후지나미 타츠미의 싱글 매치를 들 수 있다. 마에다는 초반부터 강렬한 킥을 안면이나 가슴팍에 퍼부어 후지나미를 압도하나, 후지나미도 이에 지지 않고 정면으로 덤벼왔다. 코너에 몰린 후지나미를 대차륜 킥으로 공격해 후지나미의 이마에서 유혈 (주 2). 마지막에는 스스로 로프 반동을 하는 UWF세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을 취했다. 마에다가 사용한 플라잉 닐 킥과 후지나미의 점핑 하이킥이 공중에서 교차. 양자 후두부로 떨어진 더블 KO라는 장렬한 결말이 되었다. 이 대결 후 마에다는 "무인도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동료가 있었다."라고 말해, 외관에서는 UWF세와 신일본의 이데올로기 싸움의 종료가 다가오는 듯 했다.
그 후 1987년 들어 전일본에서 활동했던 초슈 등 저팬 프로레슬링세가 신일본에 전격 복귀. 이즈음부터 서서히 UWF세는 변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6월 12일 양국 국기관에서 IWGP 리그전 결승 이노키 대 마사 사이토전에서 이노키가 4연패를 달성한 후 이노키 세대에 의해 링 위가 장식 되는 것에 초조한 초슈가 마에다를 설득해, 링 위에 후지나미/마에다를 불러내 세대 투쟁을 어필. 이에 마에다가 "세대 투쟁이든 뭐든, 누가 제일 강한지 정해질 때 까지 하면 돼. 정해질 때까지!"라고 호응. 이노키, 마사 사이토 등 구세대군과 초슈, 후지나미, 마에다를 중심으로 한 신세대군의 싸움이 시작되어 UWF 존재 의의는 형태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그리고 이 싸움의 주동자인 초슈의 신세대군 해산 선언으로 구세대군과 싸움의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 그리고 마사 사이토가 이노키와 공투를 싫어해 다시 싸우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저팬세와 UWF세 사이에 대립이 생겨, 마침내 11월 19일 코라쿠엔 홀의 유신군 대 UWF의 6인 태그 매치에서 마에다가 초슈가 방어를 할 수 없는 배후에서 안면을 향해 걷어 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에다 안면축격사건"을 일으켰다. 초슈는 오른쪽 이마동저골절의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어,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암묵의 룰인 "고의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공격은 해서는 안된다."라는 금기를 어긴 마에다는 그 행위를 내외로부터 문제시되어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 해제 조건으로 멕시코 원정을 선고받지만 이를 거부. 1988년 2월 1일부로 신일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는다.
제 2차 UWF
1. 개요 :
팬 및 전문지에서는 신생 UWF 또는 신 UWF로 불린다. 1988년 마에다 아키라에 의해 개양된 프로레슬링 단체. 구 UWF는 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의 약칭인데 반해, 신생 UWF는 Union of Wrestling Force의 약칭이며, 후에 UWF 인터네셔널이 이 명칭을 계승하고 있다.
구 UWF는 스폰서를 구하는데 어려움으로 인해 붕괴했지만, 신일본과 제휴 시에 UWF 스타일을 티비를 통해 어필했던 것으로 전국적으로 팬의 지지를 얻는 것에 성공해, 같은 해 5월의 코라쿠엔 홀에서 개양전의 티켓이 불과 15분 만에 완매하는 등, 개양 전부터 비정상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양전을 하는 삿포로 대회 이틀 전부터 회사를 쉬고 휴가를 오는 팬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가 가열되었으며, 레이저 라이트에 의한 회장 연출, 달에 1회 흥행과 시합 비디오의 판매로 수익을 낸다는 기존 프로레슬링과는 다른 새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당초부터 흥행도 기존의 시리즈 순회 형식이 아니고, 달 1회의 단발 형식으로 줄여 각지의 주요 회장을 도는 빅 매치 형식을 채용해, 연전에 의한 선수의 컨디션 저하를 예방했다. UWF의 시합은 킥에 의한 하드 히트를 반복하기에, 컨디션 유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는 말도 있다. 대회마다 기념 상품을 만들거나 전의 대회를 완전 수록한 비디오를 다음 대회에서 재빨리 판매하는 것으로 수익을 늘려 적은 흥행 수를 보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선수들의 질 높은 시합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어, 팬들 사이에서도 "빨리 UWF를 보고 싶다면 밀항해서라도 회장에 갈 수밖에 없다."라는 긴박감을 자극해, 대 성공을 거둔다.
이후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 슛 복싱과 합동 흥행 "한여름의 격투기전"의 메인에 마에다 대 제럴드 골드전을 벌여 성공. 이후에도 대회를 열 때마다 티켓 완매 기록이 계속되어 당시 다소 어려움을 겪던 프로레슬링계에서 유일하게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며 독주했다. 나중에는 룰의 정비에도 착수해, 제 1차 UWF에서 시험했던
- 시합은 모두 싱글 매치 단판 승부.
- 승패는 KO 혹은 기브업 만으로 핀폴 없음.
- 5회 다운. 3회의 로프 이스케이프로 1번 다운으로 인정. 포인트를 모두 잃으면 TKO패가 된다.
라는 기본적인 골조를 결정. 타카다, 야마자키가 빠른 속도로 마에다에 필적하는 힘을 길러내, 단체 내의 파워 밸런스도 안정된다. 그 후 밥 백런드 대 타카다 전이나, 오사카 구장에서 마에다 대 크리스 도어맨의 경기 등으로 화제를 만들어 냈다.
1989년 들어 신일본을 탈퇴한 스즈키 미노루, 후지와라 요시아키, 후나키 마사카츠가 입단해, 선수 층이 더욱 두터워져, 같은 해 11월에는 도쿄돔에 진출 (대회 명은 U-COSMOS). 티켓 발매일에만 4만 장의 판매를 기록. 최종적으로 6만명을 동원했다.
제 2차 UWF는 노먼 스마일리, 맥 로쉬, 바트 베일, 자니 바렛트, 웰링톤 윌킨스 Jr., 딕 레옹 프라이 등 단골 외국인 선수도 있었지만, 너무 어려운 시합과 외국인 초빙에 드는 경비 문제로 좀처럼 정착하는 외국인 선수는 없었고, 일본인 선수가 충실한 덕에 대부분 시합은 일본인 대결로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제 2차 UWF는 순조롭게 운영되는듯 했지만, 안경 슈퍼의 프로레슬링 참가로 프런트와 선수 사이에 불협 화음이 생기면서 SWS 소속 선수를 링에 올릴지 말지로 마에다와 신 신지사장이 대립. 프런트가 모든 선수를 해고하는 것으로 끝나, 1990년 12월 나가노 대회에서 후나키 마사카츠의 요청에 의해 결장 중인 마에다를 포함한 모든 선수가 링에 모여 만세 삼창. 선수의 일치단결을 어필하여 신단체 설립의 느낌을 주었지만, 이를 끝으로 흥행은 끝났다.
그 후 선수 주체로 신단체 (당시 일반적으로 "제 3차 UWF"로도 불리었다.)를 설립할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각 선수의 방향성의 대립으로 결렬. 1991년에 신 UWF 후지와라 조, UWF 인터네셔널, 링스의 3 단체로 갈라졌다.
소속 선수
제 1차, 2차 모두 소속 :
마에다 아키라
후지와라 요시아키
타카다 노부히코
야마자키 카즈오
나카노 타츠오
안조 요지
미야토 시게오 (미야토 마사미츠)
제 1차만 소속 :
러셔 키무라
고 류마
마하 하야토 (초대)
그란 하마다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
키도 오사무
空中 마사미츠(제 2차에서는 심판)
히로마츠 사토시
칸다 히데노부
호시나 히로시
모리 야스시
오카모토 츠요시 (브루저 오카모토)
제 2차만 소속 :
후나키 마사카츠
스즈키 미노루
타무라 키요시
후케 유스케 (후케 타카쿠)
카키하라 마사히토
나가이 히로카즈 (나가이 미츠야)
나이토 카메야마
주요 타이틀
1. 제 1차 :
UWF 헤비급 타이틀 : 벨트 가운데 UWF가 새겨진 타이틀. 당초 WWF (현 WWE)인터네셔널 헤비급 타이틀이었지만, 완전히 같은 이름의 타이틀이 신일에 존재해, 같은 이름의 타이틀이 두개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 후 신마 히사시가 UWF를 떠나면서 WWF와 관계도 끝나, UWF 헤비급 타이틀이 되었지만, 챔피언인 마에다는 거의 방어전도 하지 않고 타이틀은 자연 소멸.
2. 제 2차 :
특별히 타이틀을 마련하지 않았다.
※ 주 1 : 마에다에 의하면 "(시멘트를) 하면 어느 한쪽이 큰 부상을 입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저쪽은 시멘트를 걸어왔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또한 앙드레의 세컨드에는 와카마츠 이치마사.
※ 주 2 : 이 후지나미의 유혈 사건에 대해서는 마에다가 은퇴 후 해명. 레가스 아래에 신고있던 슈즈의 쇠장식이 피를 냈다고 말했다. 또 당시 심판을 보던 미스터 타카하시도 저서에서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명언했다.
空中 마사미츠 이름좀 제대로 번역 부탁드립니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영상] UWF vs 신일본 10인 제거경기. by Cactus™
- '프로레슬링의 신' 칼 곳치. 영면.. by 릭블러드
- (충격) UWF의 마지막 자존심, 타무라 키요시 결혼발표! by 릭블러드
- 프로레슬링을 왜 보긴. 재밌으니 보지. by 릭블러드
- [뉴스]타나하시 히로시 TNA 시합 가지다 & 미사와 대 초대 타이거가 대결 by 공국진
# by | 2009/07/08 10:31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http://spysee.jp/%E7%A9%BA%E4%B8%AD%E6%AD%A3%E4%B8%89